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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및 정보알리기

지나간 중국: 후진타오는 누구였던가?

세계 최대의 정치조직인 중국을 이끌어가면서 13억이 넘는 인구를 통치하는 사람은 어떤 인물이었어야 했을까? 미지의 인물 '후진타오'는 2002년 11월에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되더니 2003년에는 국가주석이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고과표에 아무것도 올라있지 않는 상태에서 권좌에 오르게 된 그가 두 자리를 겸하고 나서 100일이 경과하자 그의 리더십은 갈수록 열띤 논쟁의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낙관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후진타오가 사스 위기에 개방적으로 임하라고 명령한 사실과, 재판절차를 무시하며 가혹하기로 악명 높은 구속제도를 철저하게 점검하는 일에 정부가 착수한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전임자였던 장쩌민으로부터 후진타오가 물려받은 것은 천안문 광장에서의 학살사건 이후의 중국의 사회적 협약을 지켜나가라는 수권 사항인데, 그 사회적 협약이란 정부가 독재적 방식을 계속 추구하되 그 대신 인민들로 하여금 50여 년만의 최장 기적인 지속적 번영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진타오를 총서기로 임명했던 2002년 중국의 지도자들은 인민 대중에게 단 한가지 구체적인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달러로 표시된 경제지표였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1인당 국민소득을 2020년까지 4배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습니다.

 

 향후 17년간의 민주주의 발전이나 인권 신장에 관한 이야기는 이때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후진타오에게 그 방면에서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 그의 권한은 비전이나 이데올로기 면에서 쌓아온 기록하고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진타오의 권력은 전적으로 당내에서의 그의 정통성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는 그 자신의 정치적 의지와 비전을 나라 정치에 잘 살려나감으로써가 아니라 내부 파벌들 간에 균형을 잘 이루어나가고 당 노선을 견지함으로써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후진타오는 정치적 곡예를 잘 해냈기 때문에 주석이 된 것이며 그에게 기대했던 바를 죄다 해낸 것일 뿐 그 이상 뭔가를 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쩌민의 3대 표 이론을 연구하려는 당내의 새로운 움직임을 앞장서서 이끌어나감으로써 보수파 원로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지켜나가며 당권의 지속성을 보장하고 있었습니다.

 

 경제개발 목표를 재강조하고 진행중인 부패와의 전쟁을 강행하면서 고전하고 있는 중산층에게 그들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납득시키려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 빈곤상태에서 지내고 있는 농부들을 찾아봄으로써 소외되고,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억압받고 있으며, 환멸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의 불만을 달래주려고 했었습니다.

 

 이런 모든 움직임은 각본에 따른 것입니다. 후 정부가 사스가 번졌을 때, 종래의 지도체제 하에서는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체가 드러날 테스트는 아직 치르지 않았습니다. 여론이 후진타오에게 유리하게 돌아섰었으므로 그로서는 엄격한 검열의 고삐를 늦춤으로써 그의 권력을 다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필요한 제도적 개혁에 대한 관료집단의 저항에 맞서는 데 힘을 얻게 될 것이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아주 조금이나마 독재자와는 다른 데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도자라면 우러러 받들려는 경향을 보여왔었습니다. 좋은 예가 그들이 문화혁명이 끝나갈 무렵 주은래 총리에게 보였던 존경심입니다.

 

 그 존경심은 주은재가 진정 다른 유형의 지도자라는 증거가 있어서라기보다도 마오쩌둥에 대한 환멸에서 기인하는 바가 훨씬 컸습니다.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블럼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나는 그것을 바라는 고로 그것을 믿는다" 중국 대중은 통치자의 선심을 민주주의적 가치로 착각하고 행정개혁을 진정한 정치개혁과 혼동할 수도 있지만 지도층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