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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및 정보알리기

<타임>선정. 지난 100년간 세계를 바꾼 대사건들 -2부-

 

 

5. 1960년 5월 9일 : 피임약으로 여성 해방시킨 마가렛 생거.

 

마가렛 생거는 자기 평생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전혀 모른 채 교외의 자택에서 그 날을 보냈다. 1914년 이해, 그녀는 온갖 비웃음 및 고루한 법률과 싸웠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는데, 모두 여성의 처지를 개선하고 때로는 일부 여성의 생명도 구할 수 있는 간편하고 값싼 피임약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생거는 여성의 난소에서 난자가 배출되는 것을 억제하는 호르몬의 화합물질인 Enovid-10이라는 세계 최초의 피임약을 개발하는데 필요한 기금 마련을 앞장서서 추진하였는데도, 미국의 대형 제약회사인 G.D 설 회사에서는 아무도 그 기쁜 소식을 그녀에게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생거가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의 상속자이며 친구이기도 한 캐더린 매코믹 여사로부터 기증받은 3백만 달러의 기금으로 경구 피임약을 개발하는데 성공한 존 록 박사와 그레고리 핀커스 박사로부터도 그녀는 아무 소식을 듣지 못했다.

 

 생거가 그 소식을 들은 것은, 아들 스튜어트와 손녀 마가겟이 신문을 보고 알게 된 다음날 아침이었다. 그 피임약이 산아제한용으로 안전하다는 승인이 내려졌다는 다섯 단락의 신문 보도를 읽은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흥분되지 않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 리쉬며 말했다.  

 

 "이제야말로 축하할 때로구나" 그녀는 기운을 차리더니, "샴페인을 들만한 일이다"라고 기뻐했다. 18번이나 임신을 했고 11명의 자식을 낳은 후 지쳐버린 어머니가 50의 나이에 눈을 감는 순간을 지켜본 후 평생 산아제한의 개혁운동에 몸을 바친 마가렛 생거는 그리하여 혼자서 그녀의 승리를 축하했다. 

 

 

6. 1989년 11월 9일 : 베를린 장벽 마침내 붕괴.

하럴드 예거는 TV에서 놀랄만한 뉴스를 접했다. 동독 공산당 정치국이, 몇 주간에 걸친 평화시위와, 헝가리 및 체코의 피난민의 홍수에 견디지 못하여, 모든 동독 주민은 "즉각" 어느 통로를 통해서도 동독을 떠날 수 있다고 발표한 것이었다. 이 순간, 48세의 예거는 수천 명의 운명,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구축된 후 28년 동안 줄곧 충실하게 지켜온 그 장벽의 운명을 그의 손에 쥐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가 지켜야했던 명령은 정당한 증명서가 없는 사람들의 탈출을 막는 것이었는데, 지금 그렇게 했다가는 유혈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베를린 장벽에 소상하게 적혀 있는 "인민의 이야기"처럼, 예거는 밤 11시가 좀 지나 검문소의 보초들에게 "모든 물을 열라"고 명령했다.

 

 동틀 녘까지 10만 명의 열광하는 동독 주민들이 예거 앞의 장벽을 지나 베를린에서 목이 쉬어라 절규하는 축하모임에 합류했다. 그 후 며칠 동안 흥분한 군중들은 소련 공산 압제의 악명 높은 상징인 장벽을 줄기차게 부수었으며, 샴페인으로 그들이 새로 얻은 자유를 기뻐하며 축배를 들어다. 

 

 그러나 낙후된 동독을 재건하는 엄청난 부담 때문에 그 기쁨도 곧 식기 시작했다. 1990년 독일이 정식으로 통일된지 20년이 지났지만, 이 나라는 아직도 통일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7. 1995년 8월 9일 : 닷컴 붐이 시작되다.

그게 처음에 무엇인지를 몰랐다. 우리는 브라우저를 열어본 일조차 없었다. 우리는 인터넷에 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거래가 인기 있는 것이라고 들었기에 2억 5천만 달러의 내 해지펀드가 들어가 있는 크레이머 회사에서 우리는 넷스케이프의 첫 주식 공매에 의당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는 몇 천 주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식을 어느 정도 확보한 대다수 사람들과 더불어 절대적인 횡재를 했다. 우리가 주당 12달러로 값이 책정될 것으로 생각했던 그 주식은 28달러가 되더니 개장 시세는 71달러가 되었다. 우리는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우리는 난생 그렇게 수월하게 돈을 벌어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그것이 결코 반복되지 않는 1회성 해프닝으로 그칠 것으로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서, 우리는 네스케이프가 사상 최대의 강세 국면을 아무런 각본 없이 이끌어들인 쇼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관개수로가 샌 조아킨을 싱싱하게 해놓은 것보다도 더 실리콘 밸리를 바꿔놓은, 지금은 몰락한 투자은행가 프랭크 쿼트론은 통해 시장으로 들어갔고, 모건 스탠리의 분석가인 매리 미커에 의해 키워졌으며, 네스케이프 브라우저를 사용하여 온라인으로 주식을 살 수 있었던 흥분한 주식 거래업자들을 통해 공급과잉 상태를 빚게 된 이 거래는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우리는 모든 기업을 신경제 대 구경제라는 도식으로 분류하기 시작했고, 신경제의 성격이 입증된 바 없고 이윤 조성의 능력이 없는데다 운영의 역사도 일천함에도 불구하고 은행가와 분석가와 거래업자들은 한결같이 신경제를 추구하는 기업에 매달리곤 했다.

 

 여러가지 힘이 합쳐서 역사상 최대의 거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장에 부를 갖다 주는 IPO의 재단에서 가치 평가와 주식 수입과 상식은 제물이 되고만 것이다. 

 

 네스케이프가 이처럼 통한다면, 그것과 유사한 다른 100가지도 통할 것이고 또 다른 200가지 역시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봐야 할 것이, 온라인 경제는 오프라인 경제를 밀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닷컴의 연금술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몇 조 달러의 손해를 보고 난 지금에야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시장의 상승국면을 깨뜨리게 되는 광기에 걸려들었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은행에서 일을 저질렀던 사람들은 지금 추궁을 당하고 있고 유망주를 만들어냈던 분석가들은 신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8. 2002년 1월 29일 : '악의 축'은 이렇게 탄생했다.

2001년 12월 늦게, 미국 대통령의 수석 스피치라이터인 마이크 거슨은 후일 온 세계에 파문을 일으킨 한 단순한 과업을 동료에게 맡겼다. 그는 동료 데이비드 프럼에게 한 가지 일을 부탁했다. 부시 대통령은 그때만 해도 아직 사담 후세인을 공격 목표로 결심하시는 않고 있었으나,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는 있었으며, 2002년 초 발표할 연두교서에서 후세인 정권을 전복할 이론적 정당화를 제시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데이비드 프럼이 후일 그의 저서 <옳은 사람>에서 밝혔듯이, "이라크에 대한 전쟁의 정당화를 마련하게 돼 있었던" 것이다. 프럼은 사담 후세인이 9.11 동시다발 테러와 직접 관련이 없는데도, 그를 테러 전쟁의 공격목표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프럼이 생각하기로, 이슬람 테러조직들과 후세인을 관련시키자면, 그들이 다같이 서방 민주주의를 증오하고 있다는 공통점이었다. 그런 식으로 유추한다면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추축 국가들과 유사했다. 

 

 프럼은 거슨에게 전한 메모에서 이라크를 "증오의 축"의 일부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 시점만 해도 이라크만이 대표적으로 거론이 되있었다. 프럼은 이 강경한 표현이 부시 대통령의 입을 통해 나갈 것으로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초안이 작성될 때 그 표현은 대통령의 연설문안에 그대로 포함돼 있었다. 거슨은 주요 표현안에 기독교적인 컬러를 가미하여 '증오'의 축을 '악;의 축으로 바꾸었다. 1월 중순에 이르러 부시는 후세인 정권이 반드시 물러나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 후 악의 축에는 다른 나라들이 추가되었다. 처음에는 이란, 그 다음에는 북한이었다. 부시는 그의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런 나라들은 세계 평화를 위협하기 위해 무장하고 있는 악의 축을 이루고 있다" 프럼에게 떨어진 단순한 과제가 대통령의 그와 같은 적대국 정의를 낳게 한 것이다.